이번 포스팅에서는 미국 독립 전쟁의 배경과 과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미국 독립 전쟁은 미국 내 식민지 도시의 주민들이 독립을 이루게 된 정의로운 전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국 독립 전쟁 배경
렉싱턴과 콩고드 전투 이후 대륙 회의 대표들은 빠른 무장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1775년 6월 14일 제 2차 대륙 회의에서 결의안을 발표했으며, 보스턴을 포위하던 시민군은 메릴랜드와 펜실베니아에서 신병을 모집하여 독립군을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6월 15일 대륙회의에서는 조지 워싱턴을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영국에서 군사 경험을 쌓은 인물들을 중심으로 조직을 구성했습니다.
1775년 5월 보스턴에 주둔하던 토머스 게이지가 영국의 지원을 받아 윌리엄 하우, 헨리 클린턴, 존 버고인 장군이 북아메리카로 파견되었습니다. 7월 18일 영국군은 보스턴의 전략적 중요 지점인 도체스터를 공격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독립군은 신속하게 찰스턴 반도로 부대를 파견했습니다. 찰스턴 반도에 위치한 벙커힐과 브리즈힐은 전략상 중요한 고지로 보스턴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습니다.
독립군은 처음에 벙커힐에 방어선을 구축하려고 했으나 예상과 다르게 보스턴과 가까운 브리즈힐에 참호선을 건설했습니다. 윌리엄 하우는 영국군 2,400여명을 이끌고 독립군을 공격했지만 후퇴하였습니다. 독립군은 무기와 탄약이 부족하여 철수해야만 했습니다. 영국군은 브리즈힐을 점령했지만 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으며, 이를 통해 독립군의 싸움과 의지를 몸소 체험하며 이후로 독립군을 경시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북쪽의 독립군은 캐나다를 공격했지만 실패했고, 그 이후로 조지 워싱턴은 보스턴 포위 공격에 집중했습니다. 1776년 3월 치열한 전투 끝에 독립군이 도체스터 고지를 점령하여 보스턴의 도시와 항구를 사정거리 안에 두었습니다.
당시 영국군 사령관 윌리엄 하우는 보스턴을 전략적 중요 지점이 아니라 병력 수송선이 올 때까지 잠시 머무는 주둔지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워싱턴이 이끄는 독립군이 공격해오자 영국군은 보스턴에서 신속히 철수했습니다. 1776년 3월 17일 독립군이 보스턴에 입성하여 캐나다 원정 실패를 상쇄시키고 사기가 크게 올랐습니다.
새러토가 전투
영국군은 독일군을 억압하기 위해 허드슨 강과 챔플레인호 일선을 전략적 중심지로 삼았으며, 뉴잉글랜드와 중남부 식민지를 분리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 전략의 중심 지점은 뉴욕이었습니다. 워싱턴이 이끈 독립군은 수적 열세로 인해 힘들게 패배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프리스턴을 습격하여 영국군에 큰 타격을 주었고, 이로 인해 뉴욕 전투에서 겪은 수치를 씻었습니다. 1777년 영국군은 필라델피아를 공격하였고, 9월 11일에는 윌리엄 하우가 워싱턴을 몰아내고, 26일에는 필라델피아를 점령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필라델피아가 함락된 후, 캐나다에 주둔하던 영국군 지휘관 존 버고인은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이동하여 윌리엄 하우와 합류하여 북쪽을 통제하려고 계획했습니다. 1777년 6월, 버고인은 병사를 두 갈래로 나누어 캐나다에서 출발하였으며, 직접 지휘한 부대는 챔플레인 호에서 티콘더를 거쳐 허드슨 강에 도착하기로 했고, 나머지 부대는 곧바로 모호크 강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워싱턴은 영국군의 작전을 감지하여 병력을 조직하여 적을 기다렸습니다. 9월 13일과 14일 사이, 버고인은 군대를 이끌고 허드슨 강을 건너서 올버니에로 접근했고, 이때 대륙 회의에서 뉴잉글랜드 출신인 허레이쇼 게이츠를 북아메리카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그 후, 독립군은 9월 19일과 10월 7일에 각각 프리먼 농장 전투와 베미스 고지 전투에서 영국군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10월 9일, 버고인은 영국군을 이끌고 새러토가를 철수해야 했습니다. 이때 독립군은 영국군의 식량 보급로와 퇴로를 차단하고, 필라델피아에서 윌리엄 하우가 지원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결국 10월 17일, 버고인은 영국군 6,000여명을 이끌고 항복하였으며, 새러토가 전투는 독립군의 완전한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요크타운 전투
새러토가 전투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영국군은 병력을 재정비하기 위해 필라델피아를 포기하고 뉴욕으로 철수했습니다. 독립군은 영국군의 철수를 막으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하여 북부 전역에서는 대치 상황이 시작되었습니다.
1778년 말, 영국군은 남쪽으로 이동하여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를 정복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12월 말, 영국군은 먼저 서배너를 점령하고 조지아로 진격했으며, 독립군은 이에 맞서기 위해 벤저민 링컨이 남아메리카군을 조직하여 서배너를 공격했지만 실패하여 찰스턴으로 후퇴했습니다.
동시에 뉴포트에 주둔하던 영국군이 조지 클린턴의 지휘로 남쪽으로 이동하여 찰스턴을 점령했습니다. 1780년 5월 12일, 링컨은 남쪽의 독립군 5,000여 명과 함께 영국군에 항복했으며, 이는 미국 독립 전쟁 중 독립군에게 가장 아픈 시간이었습니다.
이후 뉴욕으로 돌아간 클린턴을 대신해 콘월리스 경이 남아서 영국군 7,000명을 이끌고 남쪽으로 이동하여 공격을 이어나갔습니다. 8월 16일에 벌어진 캠던 전투에서 독립군은 영국군에게 패배하였으며, 8월 18일에는 시민군이 크게 패하면서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영국군에게 점령되었습니다.
콘월리스 경은 승리의 흐름을 따라 노스캐롤라이나를 공격했지만, 10월에 킹스 산에서 시민군의 공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로써 영국군의 노스캐롤라이나 정복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1780년 말, 독립군은 남아메리카 총사령관 너대니얼 그린의 지휘하에 남쪽으로 진군 중 기회를 엿보아 적을 섬멸했습니다. 1781년 1월 17일에는 독립군이 시민군의 협조로 영국군을 격파하였고, 나머지 영국군에게서 투항을 받아냈습니다.
3월 15일, 그린은 병력 우세를 가지고 영국군을 공격해 승리했으며, 영국군 총사령관 콘월리스 경은 철수하면서 클린턴이 버지니아로 파견한 영국군과 합류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버지니아로 후퇴한 콘월리스 경은 요크타운에 주둔했으며, 안타깝게도 그는 이곳이 해안과 육지 양쪽에서 공격 받기 쉬운 취약지라는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워싱턴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프랑스 미국 연합군은 즉시 콘월리스를 포위하기 위한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워싱턴은 프랑스 제독 그라스 백작에게 함대를 이끌고 체서피크 만으로 진입하고, 프랑스 후작 라파예트 장군에게는 요크타운에서 영국군을 포위하는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워싱턴은 영국군이 뉴욕을 공격하는 척하면서 클린턴이 이끄는 영국군을 속이기 위해 프랑스 미국 연합군 대다수의 병력을 버지니아로 이동시켰습니다.
이 작전으로 요크타운에 주둔한 영국군을 손쉽게 포위할 수 있었습니다. 클린턴은 이 소식을 듣고 본국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너무 늦은 조치였습니다. 콘월리스 경은 요크타운에서 몇 주 동안 저항했지만, 10월 19일에는 영국군 7,000여 명을 이끌고 워싱턴에게 항복했습니다. 독립군은 요크타운 전투에서 승리하여 미국 독립 전쟁의 승리를 확정했습니다.